반 고흐
1888년 겨울, 젊고 성실한 한 네덜란드 화가가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왔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밀레의 작품과 거기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큰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상의 상점에서 일하던 그의 동생 테오가 그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동생도 역시 가난뱅이였으면서도 항상 형 빈센트를 성심성의껏 도와주었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가는 여비까지 마련해주었다.
빈센트는 아를에 있는 동안 그림을 팔아 동생에게 은혜를 갚을 날만 기다리며 매일 고독 속에서 손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들은 화가로서의 사명감, 그의 투쟁과 승리, 절망적인 고독, 타인과 사귀고자 했던 간절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아를에 온 지 1년이 채 못된 1888년 12월, 그의 정신은 쇠약해져 마침내 발작을 일으켰다. 1898년 5월 정신병자 수용소로 들어갔지만 때때로 평정을 유지하였을 때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그 고통은 14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1890년 7월 고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고 그 나이는 라파엘로와 같은 37세였다.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이 채 못되며, 더욱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들은 정신적인 위기와 절망으로 작품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마지막 3년 동안에 그려진 것들이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해바라기, 빈 의자, 사이프러스 나무, 그리고 몇몇 초상화들은 천연색 복제판으로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 평범한 실내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고흐 자신이 원했던 것이다. 생을 마감한 후에야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그는 돈많은 감식가의 마음만을 만족시키는 세련된 예술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과 위안으로 채워줄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갈망했다. 또힌 고흐는 그림을 그릴 때 정확한 묘사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자신이 그린 사물들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였으며 자연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만 들어맞으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심지어 변화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하였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형태를 왜곡시켰다.
고흐의 피에타
고흐는 생을 마감하기 몇달 전 피에타를 그렸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동경하였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동생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남긴다
"들라크루아의 석판화 피에타가 다른 종이와 함께 기름과 페인트 위로 떨어져 손상되었다. 나는 그 일로 인하여 몹시 당황스러웠고 안타까웠다. 언젠가 그림을 보게 되겠지만, 지금 그 그림을 그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라는 편지를 남긴다.
아마 고흐가 피에타를 그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보고 예수가 부활했듯이 자신의 그림들도 언젠가는 부활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지 아니하였을까